지금이 4차 산업 혁명 시대라고 한다면...

* 이 글은 11월 22일 있을 JetBrains Day 서울 2018 행사에서 발표할 내용 준비과정에서 쓴 글로 필자가 발표할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필자는 4차 산업 혁명 시대가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은 표현인데, 명색이 신문인데 삼성, 4차 산업혁명시대 '일하는 방식' 바꾼다 라고 제목을 붙여놓고, 내용은 고작 독일산 솔루션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데이터베이스 교체를 대서특필하는 기사 때문입니다. 수천억의 엄청난 투자가 이뤄지는데 기사 내용은 순전히 외산 솔루션 도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뭐가 4차산업이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기울어진 언론환경에서 제 글 하나가 개선을 불러오지는 못하겠지만, 균형을 잡는 작은 행동이라도 하나 하려고 글을 씁니다.

TV 브랜드 바꿨다고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나요?

몇 일전 페친이 올린 링크의 기사에서 아래와 같은 표현이 있었습니다.
삼성을 시작으로 국내 ERP와 DBMS 시장이 일대 변혁기를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놀라울 정도로 편향된 기사입니다. 독일회사는 마음에야 쏙 들 기사지만, 고객인 대한민국 기업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그동안 사용하던 오라클을 SAP 소유의 HANA DB로 바꾸는 일이 기업에게 무슨 가치를 가져가 줄까요? 어느 가정집에서 삼성전자 TV를 사용하다가 LG 제품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
적어도 TV 대신에 유투브를 보거나 넷플릭스에 가입하는 경우 사용자의 삶에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기사에 그러한 이야기들을 다뤘다면 내용 있는 기사가 될 수 있었겠죠.

4차 산업 시대가 무슨 말인가요?

알고 싶은 마음도 없는 표현이긴 하지만 혁명이라고 강조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날고 기는 외산 기업들은 시장에 나와 있는 다양한 첨단 데이터베이스를 용도에 맞춰 조합해서 쓰는 현실에서 한물 간(?) 외산 제품 하나 교체하느라 수천억을 쓰는 일이 혁명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최소한 필자가 과거 주장했듯이 다시는 '차세대'라고 미화된 이름으로 진행하는 빅뱅식 전면 재구축을 끝내는 정도는 해야 혁명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나요?
독일 기업 제품이 미국 기업 제품에 비해 그렇게 대단할까요? 기능과 성능은 뛰어날지 몰라도 국내 업체의 비즈니스를 사전에 고려한 도구는 전혀 아닙니다. 값비싼 범용 제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능과 성능을 떠나 데이터베이스 교체를 위해서는 빅뱅식 전면 재구축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거의 같은 비즈니스 기능을 다시 개발한다는 점에서 중복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심각한 부분은 만일 구축 기간이 1년 이상 길어지면 사전에 세운 목표에 담겨 있는 요구사항탓으로 오픈 하자마자 철 지난 시스템을 만납니다. 결과적으로 사업 기회를 지연시키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외산 제품의 교체 따위는 이러한 사태 해석에 비하면 하품 나오는 일입니다.

당장 고액의 추가 라이선스 비용 지불만 막으면 문제가 해결되나?

얼마전 또 다른 소식으로 SAP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SAP의 라이선스 소송 대책을 마련하는 이야기인데요. 기사로 검색해봐도 어렵지 않게 사실 확인을 할 수 있고, 응급 대책을 공유하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이선스 비용 청구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은 아닙니다. 당장 소송은 피하더라도 향후 사업에 문제는 없을까요? 물론, 임기가 1 ~ 2년인 CIO라면 그 후에 벌어질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눈 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는 악화일로에 놓입니다.
사실 해당 기업의 SAP 라이선스 금액이 논란이 될 정도로 크다면, 그 이슈에 대해 깊이 들어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 있어서 ERP란 어떤 효능이 있는지? 일반론의 범주를 벗어나서 말이죠? 그런 가치에 입각해서 SAP 활용은 잘 되고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SAP를 오용에 가깝게 변칙적으로 사용하는 곳들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SAP 경험이 있는 지인들은 한국 기업 대다수가 그러한 식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지인이 이렇게 진단한 일이 있는데, 필자는 그의 말에 100% 동의합니다.
SAP는 프로세스 표준화를 위해 좋은 솔루션인데, 대한민국은 프로세스가 이미 잘 잡히고 난 이후에 도입해서 오히려 SAP에 맞추느라 프로세스가 퇴보하거나 경직되는 현상을 보인다.
사실 필자는 SAP 자체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경직성과 SAP의 함수관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SAP를 쓰는 곳은 하나 같이 기준 정보를 한 곳에서 관리합니다. 이에 따라 모든 프로그램의 수정이 '원장'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DBMS 스키마 변경과 관련해 있어 가급적 수정을 못하게 막는 성향이 짙어집니다. '원장 보호'가 조직 문화로 굳어지면 꼭 필요한 경우에도 수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편법에 가깝게 해결하게 되고, 곳곳에 복사한 데이터베이스와 하드코딩이 나타납니다. 이쯤 되면 Kent Beck이 Technical Debt 이라고 부른 아래 그림이 떠오릅니다. 수정할 수 없는 지경의 코드로 다가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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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ical debt를 은유한 Kent Beck의 트윗
한때, MDM이라고 부르는 모든 데이터를 한 곳에 모아두는 방식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MDM같은 방식은 경직성의 근원[1]으로 보였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은 적당한 논리도 없이 레퍼런스를 운운하며 맹신했습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한 일이 SAP와 연동하면 3개월 개발로

작년에 필자가 생산공장에서 물류센터를 거치지 않고 바로 매장으로 상품을 보내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공장에서는 박스별로 담길 상품 구성을 확인하고 박스에 붙일 스티커를 출력하는 정도의 기능이 필요하고, 매장에서는 박스를 열어 PDA나 핸드폰으로 스캔하여 상품 매장 도착을 확인하는 '입고' 작업 정도를 하면 되었습니다. 우리팀에서는 개발자 1명이 5일이면 개발할 분량이고, 품질을 조금 더 높이고 레거시 수정까지 고려해도 2명 2주면 충분한 일로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SAP 수정을 맡은 곳에서 난색을 표명했고, 어떤 이유인지 3개월이 소요된다 하여 한창 비즈니스 혁신을 주도하던 현장에서는 맥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3개월이라는 시간도 그렇지만, SAP 운영 담당자의 반응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SAP 수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지금 비즈니스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감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혹은 관심이 없거나...)

역사적 시각으로 진보를 추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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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81쪽에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비난이나 폭로가 아닙니다. 불편한 진실을 바로 보자는 마음에서 누군가에게는 욕 먹을 각오로 씁니다.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신흥 개발국가이고 통상국가라는 우리의 특수성 때문에 소프트웨어 구축에 있어 외산 솔루션 활용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재화 할 때입니다. 소프트웨어 역량은 가치 증대 효과가 너무나도 크고 가성비가 놀라운 영역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제품과 핵심 역량을 가진 전통 기업들이 반드시 이를 활용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사다 쓰는 수준으로 소프트웨어 역량이 키워지지는 않습니다.

주석

[1] 당시 모 기업에서 모바일 서비스 구현을 위한 프로젝트를 다년간 수행했는데, 바로 그 경직성 때문에 상당한 기회비용을 날린 바 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서비스는 별도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이중 투자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